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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My Life/Digilog

[디지로그시대가온다] 28. 무지개 색깔을 묻지 말라 - 디지로그 교육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무지개 색깔이 몇 색이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앵무새처럼 빨.주.노.초.파.남.보를 외울 것이다. 조석으로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디지털 신호가 만들어 내는 수천 수만의 색깔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대답한다. 교실 속의 무지갯빛이 일곱 색으로 고착된 것은 순전히 뉴턴의 스펙트럼 실험 때문이다. 그 자신이 실험실 조수에게 "너도 이 빛이 일곱 색으로 보이느냐"고 물었던 것을 보더라도 단지 뉴턴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나눠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훨씬 이전의 대석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지개 색을 네 색으로 보았고, 세네카는 다섯 색, 그리고 마루켓리누스는 여섯 색깔로 구분했다. 또 아프리카의 쇼너어족은 3색, 바자어의 부족은 청색과 황색 두 색으로 나눈다. 놀라운 것은 식물학자들도 모든 꽃 색깔을 분류할 때 바자어족처럼 청색계와 황색계의 둘로 나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1 아니면 0 이라는 양분법적 디지털 사고가 아이들의 색채 개념을 빈약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말 사전에 수록된 색채들은 빨간색만 해도 56가지가 된다고 한다. 대체 어느 나라의 말이 빨갛다와 뻘겋다를 구별하고 발갛다와 벌겋다의 차이를 나타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불그레와 불그스레가 다르고, 볼그레와 볼그스레가 서로 다른 미묘한 색채의 정감을 나타낸다. 거기에 불그스름과 불그죽죽의 꼬리까지 달라지면 색깔은 걷잡을 수 없이 가지를 친다. 그러나 이렇게 풍부한 색깔문화도 이념화하면 오방색이 된다. 거기에서 음에 속하는 흑백의 무채색까지 빼고 나면 청.홍.황의 삼 태극 빛만 남는다. 그래서 서양의 교통체계가 한국으로 오면 그린(綠)사인이 청색으로 둔갑한다.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이념적인 편 가름을 할 때에는 작은 차이는 무시돼 원색 안에 흡수된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초록색 신호를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청색 신호등'이라고 부른다. 이념은 색맹을 만든다. 그리고 다양한 색채를 죽여 오직 한 색만을 남기려 한다.

금욕적인 청교도였던 포드 1세는 검은색 자동차만을 생산해 왔다. 미국에서 자동차 색깔이 다양해진 것은 GM사에서 시작된 일로 그 뒤 탈이념적 시대에 들어서면서 색깔 옵션은 1700여 개로 늘어났다. 거기에 비해 우리의 자동차 색깔은 100색을 넘지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도 소비자의 성향으로 흑백이 그 주류를 이룬다. 초등학교에 교육에서도 우리는 열 가지 색(10색상환)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보통 84가지를 배운다. 그래서 한국색채연구소의 한동수씨는 1000여 색을 도입한 특수 유아교육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도루묵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디지로그 사회를 선점하려면 우선 무지개 색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이들에게 빨주노초파남보를 외우게 할 것이 아니라 그 색채와 색채들 사이에 있는 것들, 아직은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경계 영역의 어렴풋한 빛깔로 눈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미래의 땅 빛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커서 오직 한 색깔의 크레용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왜 크레용 상자에는 자기가 필요로 하지 않은 색깔까지 들어가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는 컴퓨터의 컬러 바와 같은 색채는 아무 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아이들이 만나는 색깔들은 이슬과 향기에 젖어 있는 붉은 꽃송이이거나 바람이 불면 짐승처럼 웅성거리는 초록색 이파리들이거나 혹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다의 빛들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성서의 이 한마디 말은 꼭 기억해 둬야 한다.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누가 뱀을 주겠는가." 하물며 아이들이 달라고도 하지 않은 뱀을 그것도 독 있는 뱀을 던져 주어서야 되겠는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2.01 20:35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