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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My Life/Digilog

[디지로그시대가온다] 4. 인터넷 속 세 왕자와의 동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디지로그 시대의 새 물결이라고 하면 '제3의 물결' 다음에 오는 제4의 물결쯤으로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물처럼 연속적으로 흐르는 문명을 제1이니 제2니 하는 순서로 분절하는 방법 자체가 이미 구시대적인 디지털적 발상이다. 앞으로 우리가 맞게 될 디지로그 시대란 스핑크스의 난문(難問)보다도 어려운 문제를 풀 때만이 도달할 수 있다. 그 수수께끼는 먼 나라의 공주에게 청혼하러 가던 세 왕자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보물 자랑을 하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중 왕자 한명이 천리안의 거울을 보여주다가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는 공주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순간 천리마를 자랑하던 왕자는 천리 밖 공주의 성으로 단숨에 달려가게 되고 불사약을 비장했던 왕자는 그 약초를 먹여 극적으로 공주를 살려낸다.

문제는 이 공주가 누구와 결혼을 해야 되느냐 하는 수수께끼다. 정보 마인드를 지닌 네티즌들은 당연히 천리안의 왕자를 내세울 것이고 폭주족처럼 질주하는 산업주의자들은 천리마의 왕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웰빙족들은 농자천하지대본의 정신으로 불사의 약초를 먹인 왕자 편을 들 것이다. 하지만 세 보물의 수퍼 파워는 서로 연동해 작용했기 때문에 어느 왕자 하나만을 골라서는 절대로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할 수 없다. 어차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적 강박관념 밑에서 살아온 서양 쪽에서는 해답을 구하기 힘들므로 동양 쪽 고전을 찾아보면 어떨까. 뜻밖에도 '천평어람(天平御覽)'의 고사에서 충격적인 해답 하나를 찾아낼 수 있다.

제(齊)나라에 사는 한 처녀가 두 남자에게서 청혼을 받게 되었는데 동쪽 마을에 사는 청혼자는 돈은 많으나 얼굴이 밉고, 서쪽 마을에 사는 청혼자는 얼굴은 잘났지만 가난해 먹을 것이 없다고 했다. 이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부모의 말에 그 소저는 선뜻 두 곳으로 다 가겠다고 대답을 한다. 밥은 부잣집 동쪽 남자에게로 가서 먹고, 잠은 잘생긴 서쪽 남자와 자면 된다는 것이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가 얼마나 황당했으면 뒤에 떠돌이를 뜻하는 말로 와전돼 내려왔겠는가. 이 동서 병합의 모순논리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해 보면 틀림없이 에러 메시지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동가식서가숙'의 모순논리는 인터넷 사이버 세상에선 보통 일어나는 일이고 오프라인의 현실에서도 곧잘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아니다. 그것은 제3의 물결 다음에 오는 현대문명의 출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아날로그적인 것은 악이고 구식이고, 디지털적인 것은 선이고 첨단이라는 양자택일의 틀이 무너지고 있다. 비트와 아톰, 클릭 산업과 브릭(brick) 산업, 온라인과 오프라인,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이 모든 대립은 깨끗하게 금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혼류(混流)하고 융합되고 충돌하면서 병존해간다. 이종 결합의 하이브리드나 원 소스 멀티 유스와 같은 말이 그 단편적인 징후를 보여준다.

해답과 선택은 오직 하나라는 종래의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비로소 공주는 세 왕자와 결혼할 수 있다. 그리고 불사의 약초가 지닌 생명력, 천리마의 산업적 동력, 그리고 천리안의 정보의 힘은 프랑스의 3색기와 같은 평행선이 아니라 서울 올림픽 로고였던 3태극마크처럼 둥글게 둥글게 얽혀서 돌아가야 한다. 시루떡 정보가 '탠지블 미디어'로 부상하고 젓가락 정신과 기술이 관계기술(RT)의 원천으로 각광받는 세상이다.

어려운 이야기 할 것 없다. 이 지구상에서 농경-산업-정보 세 문명의 왕자를 동시에 데리고 사는 유일한 공주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한국인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엊그제까지 나물 캐던 채집시대에서 초고속 정보시대의 선두에 서 있는 나라, 망신스럽기도 하고 한없이 자랑스럽기도 한 이상한 나라, 붉은 악마가 외치던 대~한민국이다.

이어령 중앙일보사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03 19:29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