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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My Life/Digilog

[디지로그시대가온다] 24. '아노토 펜' 이 붓 문화 살린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전기 모터와 가솔린 엔진을 합쳐 하이브리드 카를 만들어 낸 것처럼 스웨덴에서는 펜으로 쓴 메모장의 내용이 그대로 PC나 휴대전화로 전송되는 아노토(anoto)의 펜이 개발됐다. 물론 종이 위에 잉크로 쓴 아날로그 정보도 펜대에 내장된 A4용지 40장 분량의 메모리에 디지털로 기록 보존된다. 펜촉에 달린 카메라가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무수한 점을 인식한다. 그 특수지의 패턴을 모두 합치면 유라시아 대륙만한 스케치 북이 된다고 하니 SF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현재 노키아 6630/보더폰 702NK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현실 속의 이야기이다.

이 펜의 개발자인 파헤우스 박사는 수학자.물리학자만이 아니라 신경생리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컴퓨터 연구가들이 생물학자들처럼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고 낙지를 기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앞으로 디지털 회로와 신경 회로가 합쳐지는 디지로그 기술이 늘어갈 것이라는 건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아노토 펜의 충격은 엄지족이 아니라도 디지털 환경과 접속할 수 있다는 편의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두 문화 환경에서 가장 심한 단절을 이루어 온 것이 바로 글씨 쓰기일 것이다.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떤 필기도구를 사용했든 인체와 손으로 쓴 글씨 사이에는 분리할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이 있었다. 소위 사람마다 다른 필적(筆跡)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걸어다니면 땅위에 발자국이 생기듯이 종이 위에 글씨를 쓰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의 흔적이 찍힌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옛날부터 지문처럼 필적 감정을 통해 범인을 잡는 일이 많았다. 미술사가 르네 위그의 말마따나 용접공이 철판을 절단한 그 선에서도 그 사람 고유의 흔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은행 금고를 턴 파리의 대도를 추적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타자기라 해도 사람의 습관에 따라 카본 테이프를 통해 찍혀 나오는 문자에 강약의 터치가 생겨나지만 발자국 없이 다니는 유령처럼 아무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것이 유일하게도 컴퓨터 액정판 위에 비치는 디지털 문자다. 컴퓨터에서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우리는 개성과 신체성을 상실한 귀신이 되는 셈이다.

이뿐 아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두 문화적 특성은 분절된 것과 연속체로 붙어 있는 것의 차이에 있다. 서양 문화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것이 한자든 한글이든, 그리고 가나문자든 모두 띄어쓰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삼국 모두 초서처럼 물이 흐르듯 글씨를 붙여서 써내려갔다. 사실은 서양도 처음에는 우리처럼 단어를 붙여 썼던 것을 후에 와서 띄어 쓰는 필기법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좁은 지면에 자세히 논할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서양의 근대문화가 디지털적이고 동양문화가 아날로그적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가 붙여 쓰기와 띄어쓰기, 그리고 서양의 펜과 동양의 붓이다.

보통 펜글씨로도 쓸 수 있고 그것이 자동으로 디지털의 문자로 바뀌기도 하는 양서류 같은 아노토 펜 속에서 죽어가던 붓글씨의 재생을 보게 된다.

그리고 붓의 발명자로 전해지는 '사기(史記) 열전'의 몽염(蒙恬) 장군이 떠오른다. 융적(戎狄)을 쳐 공을 세우고 만리장성을 쌓은 몽염 장군이지만 마지막에는 정적에게 밀려 사약을 받고 죽는다. 처음에는 억울하다고 항변했지만 자신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무수히 지맥(地脈)을 끊었던 사실을 깨닫고 그 때문에 하늘의 벌을 받는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아노토 펜이 암시하는 미래의 문명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몽염이 말한 땅의 지맥이 자연의 연속체를 의미하는 아날로그 문화이고 그것을 끊은 만리장성이 디지털의 불절 문화라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26 20:17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