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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My Life/Digilog

[디지로그시대가온다] 21. 권위의 구배 - 극지에는 꽃이 없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우리는 자판을 통해 인간과 컴퓨터의 궁합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리고 '공명실 효과'로 인터넷의 사이버와 현실의 두 세계가 또한 엇박자라는 것도 엿볼 수 있었다. 비록 비늘을 주워 대해의 물고기를 논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사이에서도 심상치 않은 틈과 대립이 생겨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터넷의 공명실에서 이제 셸(SHELL) 모델의 (9회 참조) 비행기 안으로 들어갈 때가 된 것 같다. 닭장(cockpit)으로 불리는 그 좁은 조종실은 현대 문명사회를 그대로 압축해 놓은 밀실이다. 라이브웨어(인간)를 뜻하는 SHELL의 마지막 두 글자(LL)처럼 나란히 놓인 조정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현대는 린드버그나 생텍쥐페리처럼 단독 비행을 하는 영웅의 시대가 아니다.

아무리 권위 있는 기장이라 해도 부조종사와 다른 승무원들의 도움 없이는 한시도 안전 비행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지위보다는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하고 숨김없이 토의하는 민주적인 팀워크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기장의 권위가 부정되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속담처럼 되고 만다. 의사결정을 내일로 미룰 수 없는 것이 날아가는 비행기이다. 만약 분초를 다투는 위기상황에서 강력한 권한과 책임을 맡고 있는 기장의 영이 서지 않는다면 평등주의는 때로 장애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권위의 구배가 수직이 되면 독재의 경직성에 빠지고, 그것이 수평이 되면 아나키(무정부적) 혼란이 온다. 비행기는 날개로 나는 것이 아니라 조정실 안의 권위와 평등의 구배 선의 균형으로 난다고 해야 옳다. 그것이 비행의 안전 관리 시스템에서 중시되는 '권위의 구배'(authority gradient)라는 용어이다.

바퀴가 나오지 않은 것을 모르고 동체 착륙을 했던 대한항공의 보잉 727의 사고에 대해(1991년 6월 13일 제주~대구노선) 호주의 민간 항공 안전국장 믹 톨러는 그 원인을 '아시아적 권위의 구배'라고 진단했다. '기장은 신이며, 그 앞에서는 감히 누구도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권위주의 문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파른 권위의 구배는 아시아적 문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9회 참조) 밝힌 대로 5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낸 네덜란드 항공사 KLM의 카나리아 군도의 참사는 기장이 부조종사의 말을 묵살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박.철도, 그리고 의료 사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안전관리에서는 '권위의 구배'라는 키워드가 자주 쓰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더 넓게 가정.사회.기업.정치, 그리고 국가의 관료조직 모두에 적용할 수가 있다.'권위의 구배'가 수직이 돼 갈수록 독재시대의 아슬아슬했던 추락의 위기를 겪게 되고, 그 경사도가 수평이 돼 권위가 땅에 떨어질수록 조종사 없는 무인 비행기를 탄 아나키의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극단.극한.극성.극렬 등 '극'자가 붙은 말 가운데 그래도 쓸만한 것은 극락(極樂)밖에 없지만 거기는 죽어서나 가는 곳이다. 영어의 블랙은 검은색, 프랑스어의 블랑은 흰색으로 정반대 말이지만 그 뿌리는 모두가 같은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북극이든 남극이든 좌파와 우파,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극지(極地)에는 차가운 빙산뿐이다. 꽃은 없다.

수천 년 전부터 역경(易經)에서는 '권위의 구배'가 논의돼 왔다. 한 일 (一)자에 멈출 지(止)자를 쓴 정(正)은 일정한 선에서 멈춰서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게 가운데 선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삶의 가치인 중정(中正)이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라는 젊은이의 유행어를 들을 때 우리는 문득 주역의 중정과 유교의 중용을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 문화 유전자 '밈'이 같아서인지 모른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23 19:34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