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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My Life/Digilog

[디지로그시대가온다] 11. 컴퓨터와 인간의 궁합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컴퓨터를 향해서 "야! 이 똑똑한 바보야"라고 호령할 수 있는 사람은 완고한 노인만이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보다 오히려 컴맹 쪽이 더 정상이다. 원래 인간은 아날로그적이고 컴퓨터는 디지털적으로 그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PC는 인간이 쓰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까다롭고 모양도 정을 붙일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미국 인지과학회 회장이었던 D A 노먼이 한 소리이다. 인간이 수백만 년 동안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생물적 진화'를 해왔다면 컴퓨터는 실험실이나 공장의 환경에서 '기계적 진화'를 수행해 왔다. 전기 스위치를 넣자 필라델피아 도시 전체의 가로등이 껌벅거렸다는 애니악의 그 집채만 한 컴퓨터가 단추만 한 건전지 하나로 움직이는 모바일 컴퓨터로 진화했다. 그런데도 자판만은 옛날 그대로라는 비웃음을 사게 된 것도 그 진화의 배경이 다른 데서 오는 비극이다.

컴퓨터와 인간을 연결시키는 인터페이스(자판)는 어느 한쪽의 진화만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영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A'자를 제일 작고 약한 새끼손가락으로 찍어야만 하는 바보짓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비극을 노먼은 "인간이 디지털 세계에 갇혀 있는 아날로그적 생물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연 속에서 진화해온 인간은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고 끈질기다. 그런데 컴퓨터는 인간에게 엄격하고 딱딱하고 비관용적인 것을 요구하는 기계적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시스템이 전연 다른 인간과 컴퓨터는 상보적인 인터랙션 전략을 통해서만 공존이 가능하다. 교육헌장의 표현대로 우리는 '기술 중심의 제품에서 인간 중심의 제품'을 만드는 인류중흥의 빛나는 시대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노먼이 말하는 차세대의 '보이지 않는 컴퓨터'란 디지털의 컴퓨터와 아날로그의 인간이 서로 만나 디지로그의 유전자를 지닌 새 아이를 낳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어떤 컴퓨터인지는 모르나 자신의 저서 속에서 제시한 인지과학의 퀴즈문제를 풀어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문제는 대홍수 시대의 모세는 동물을 몇 쌍씩 방주에 넣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하지만 이 퀴즈의 어려움은 한 쌍이든 두 쌍이든 어떤 숫자를 대도 정답이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노아'를 '모세'라고 한 질문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웬만한 사람들은 속는다. 방주에 넣은 동물의 짝수에만 신경을 쓰다가 노아를 모세라고 한 잘못에 대해선 눈치를 채지 못한다. 인간의 두뇌는 컴퓨터와 달라서 큰 차이가 아니면 대충 넘어가도록 되어 있다. 모세도 노아도 모두가 구약시대의 인물이고 글자 수도 두 자로 돼 있어 비슷하다. 만약 모세가 아니라 '클린턴'이라고 했다면 금세 잘못을 알아챘을 것이다. 노아를 모세라고 잘못 말하는 것도 인간의 특성이요, 그렇게 잘못 말해도 그냥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것 또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넉넉하고 관대한 인간의 인지력이야말로 생존에 필요한 귀중한 능력 가운데 하나다.

놀랍지 않은가. 만약 우리의 뇌와 그 인지 시스템이 1이나 0 하나만 틀려도 절대 그대로 넘어가지 않는 디지털 언어로 되어 있었더라면 "문 닫고 들어오라"는 말을 절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밥도 물도 제대로 마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육안이 현미경의 시스템과 다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한 균이 있어도 즐겁게 시원한 냉면을 먹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어령 중앙일보사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11 20:49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