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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My Life/Digilog

[디지로그시대가온다] 13. 배달부의 초인종은 클릭 소리보다 크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배달부의 초인종은 클릭 소리보다 크다.

집 안에 틀어박혀 인터넷만 하던 청년이 채팅으로 사랑하게 된 여성에게 꽃다발을 보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장미를 보낸 지 100일째 되던 날 그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것은 그녀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이었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적혀 있었다. "꽃을 보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매일 장미를 배달해준 꽃집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그냥 웃고 말 유머가 아니다. 그 인터넷 청년의 충격은 네그로폰테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단순한 비트와 아톰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뜻밖의 청첩장을 받기 전까지 그는 배달부의 초인종 소리가 컴퓨터의 클릭 소리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초인종이라는 말, 배달부라는 촌스러운 구식 말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초인종(招人鐘)이라는 말이 벨이니 클릭이니 하는 낯선 외래어보다 정감 있게 들리는 것은 옛날에 대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초인종은 한자 뜻대로 읽으면 사람(人)을 부르는(招) 종(鐘)이라는 뜻이다. 방 속에 틀어박혀 인터넷만 하던 그 젊은이는 모든 정보통신의 미디어가 본질적으로 초-인-종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젊은이들을 우리는 인터넷 중독자, 일본 사람들은 '오타쿠', 중국인이라면 '인특망광(因特網狂)', 그리고 영어권 사용자들이라면 워크홀릭을 본떠 '웹홀릭(webholic)'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레이엄 벨이 통신 사상 처음으로 조수와 전화 시험통화를 했을 때 그 첫마디 소리는 "웟슨군. 이리 오게(Mr. Watson, come here, I want you)"라는 부름의 메시지였다. 그렇다. 분명 사람을 부르는 욕망의 일성(一聲)에서 전화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전화 용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만남의 약속이다. 그 욕망의 거미줄이 컴퓨터와 연결되고, 그 줄이 동(銅)에서 광섬유로, 통신위성의 보이지 않는 공기의 전파로 진화해 간 것-그것이 바로 오늘의 인터넷이며, 월드 와이드 웹(www-세계에 널리 쳐진 거미줄)이다. 중국식 표현으로 하자면 계산기가 전뇌(電腦)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셈이다.

그러한 인터넷 공간의 기계적 진화권(進化圈)에 비해 오프라인의 생물적 진화권에서는 여전히 빨간 자전거를 탄 우체부 아저씨의 환상이 남아 있다. 한 손에 장대처럼 높이 우동 그릇을 쌓아 올린 중국집 배달부의 모습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옆에서 아이들이 전화를 거는 것을 지켜보라. 아이들은 한참 수다를 떨고 난 다음 전화를 끊으면서 하는 말이 있다. "자세한 건 거기에서 만나 이야기하자!"라고. 대체 전화로 실컷 말하고 만나서 다시 자세히 말하자는 것은 무엇인가. 자그마치 120년 전 전화가 발명됐을 때 벨이 "웟슨군, 이리로 오게"라고 했던 것과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정보 감각이다. 현실 공간이 아니면 도저히 소통될 수 없는 생물적인 정보 욕망이 세대를 건너뛰어 지속된다.

처음 전화가 가설됐을 때 서울에 유학 간 아들에게 보내려고 전화줄에 시루떡 봇짐을 달아맸다는 우리 할머니들을 무식하다거나 망령이 났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인터넷을 하고 있는 당신네의 손자들도 다만 의식하지 않을 뿐 생물적인 원초적 정보 욕망을 지니고 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터넷 거미줄의 허공에 걸려 있는 당신의 손자들이 아무 때고 자유로이 땅바닥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디지로그 장대나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13 18:57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