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문 닫고 들어오라"는 말은 틀린 말일까. 기계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바람도 아닌데 어떻게 문을 닫고 들어올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통해온 말이다. 단지 '들어오다'와 '문을 닫다'의 두 언표(言表) 가운데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문을 닫으라는 말이 앞에 나온 것뿐이다.
인지 과학자들이 말하는'칵테일 파티 효과'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칵테일 파티장은 그야말로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칵테일돼 뒤얽혀 있다. 그런 잡음 속에서도 용케 사람들은 각자가 불편 없이 대화를 나눈다. 거기에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말을 나누고 있는 장면을 본 부인이 있었다면 잡음 속에 섞여 있는 대화 내용을 금세 엿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질투심이 불러일으킨 초능력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듣고자 하는 소리를 식별해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의 귀는 잡음을 수동적으로 균질하게 기록하는 녹음기와는 다르다. 현상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중시해온 '지향성'의 문제다. 인간의 지향성이 컴퓨터 관련 과학자들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면서 '칵테일 파티 효과'라는 조금은 사치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어째서 100년 전의 키보드를 그대로 두드려야 하는가 하는 불평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컴퓨터에는 필요한 소리만 걸러내는 인간 같은 '칵테일 효과'의 지향성이 없다. 그래서 잡음이 없는 환경에서만 음성인식 기술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잡음과 함께 살아온 인간이다. 조용한 산사에 가도 풍경소리가 울리지 않는가.
원래 1, 0으로 된 디지털 신호는 아날로그의 잡음을 제거하는 뛰어난 능력을 과시해 온 것인데 아니로니컬하게도 막상 자연공간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향성 마이크란 것을 개발했지만 인간의 칵테일 효과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컴퓨터를 기계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애매성, 비조직성, 주의산만, 감정적, 그리고 비논리적이다. 그런데 기계는 반대로 정확성, 조직적, 주의의 고정성, 그리고 감정에 흐르지 않고 논리적이다. 한마디로 기계는 사람보다 우수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그 평가는 물구나무 서기다. 기계는 우직하고 반복적인데 비해 인간은 창조적이다. 기계는 융통성이 없고 변화에 둔감하고 또 상상력이라는 것이 전연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황에 따라 금세 적응하고 임기응변을 할 줄 안다. 무엇보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꿈꾼다"는 스필버그의 말대로 인간은 꿈꿀 줄 안다.
이렇게 노먼이 제시한 기계와 인간의 두 가치 패러다임을 놓고 볼 때 컴퓨터와 인간의 동거는 엔지니어의 남편과 시인의 아내가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엔지니어는 기계의 이치는 알아도 사람의 마음은 읽을 줄 모르고 시인은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기계에 대해서는 낯설다.
또 위에서 비교한 인간 대 기계의 서로 다른 관점을 살펴보면 서구문명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기계중심적 관점에 서 있고 아시아 문명권에 살아온 한국인들은 보다 인간 중심적 관점에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IT는 산업시대의 기계기술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디지털 기술이 진화되려면 아날로그의 수혈을 받아야 한다. 정보시대의 디지털 혁명은 컴퓨터를 닮은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컴퓨터가 모르는 '칵테일 파티 효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진화한다. 아날로그적 시인이 만든 디지털 문화, 그것이 미래의 우리 블루 오션이기도 하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12 19:2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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