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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My Life/Digilog

[디지로그시대가온다] 18. 사이(間) 문화가 낳은 싸이 문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맥주는 개화기 때 서양에서 들어온 술이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그 병 크기가 배로 커졌다. 혼자서 자작을 하는 서양 사람과 반드시 서로 술을 따라주며 대작하는 한국인의 술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다. 혼자 마시든 여럿이서 건배를 하든 서양 사람들의 술잔은 항상 자기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술잔은 너와 나 사이에 있다. 영어로 흥을 인터레스트라고 하는데 그것 역시 사이(inter)에 존재한다(est)는 뜻이니 잔은 사이에 있어야 신명이 난다.

술뿐이겠는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 그리고 친구 사이, 연인 사이 한국인은 '사이'에서 존재하다 '사이'에서 죽는다. 그래서 생존의 삼대 축인 인간(人間).시간(時間).공간(空間)에는 모두 사이 '간(間)'자가 들어 있다.

'생각의 지도'를 쓴 리처드 니스벳의 실험 결과에도 나타나 있듯이 사물을 볼 때 서구 학생들은 개체를 보는 데 비해 아시아의 학생들은 개체와 개체 간의 관계를 본다. 그래서 아시아의 경제발전을 인간 사이의 끈적끈적한 정분으로 풀이한 학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시아의 부패와 경제성장의 장애요소로 중국의 콴시(關係)처럼 연고주의.정실주의를 드는 연구가도 있다.

평가를 어떻게 하든 한국의 '사이(間)'란 말을 세게 하면 '싸이'가 되어 그 순간 엄청난 인터넷의 폭발력이 생기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촌 맺기의 핵심 아이디어로 인터넷 인구의 절반을 휩쓴 싸이월드의 위력은 바로 한국의 '사이 문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사자들도 '싸이월드'를 '사이좋은 세상'이라고 표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말로는 '사이'가 되고 영어로는 사이버의 '싸이(cy)'이다.

앞에서(17회) 설명한 것처럼 인터넷의 익명 관계를 오프라인의 '아는 사람'(연고 관계)으로 바꿔가는 추세로 한국은 서양보다 훨씬 유리한 풍향을 맞게 된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같은 아이디어로 출범한 '식스디그리 닷컴'(1997년)이 문을 닫게 되는 그해 (2001년) 거의 같은 시각에 한국의 싸이월드는 월간 1억 페이지뷰의 경이적인 세계기록을 세웠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겨우 1년 조금 지난 최단기간에 이룩한 믿기지 않은 폭발력이다. 같은 비즈니스 모델인데도 한국의 '사이 문화' 때문에 배로 커진 맥주병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사이' 문화가 낳은 '싸이'는 차가운 인터넷, 핏발 선 인터넷, 그리고 모두들 가면을 쓰고 광란의 춤을 추는 인터넷 카니발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가면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 그대로다. 따뜻하고 정감이 스며 있는 아름다운 인터넷, 카니발 광장은 정다운 친구를 맞이한 미니 룸이 된 것이다. 너와 나 사이를 위해 양탄자를 깔고 벽지를 바르고 신데렐라 마차같이 팬시한 실내장식 아이템들을 장만하려고 사이버 머니의 도토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한 개 100원 하는 도토리의 하루 평균 매출이 250만~300만 개로 3억원 가까이 팔려 경제적 효과도 크다. 거기에 배경음악, 스킨과 같은 것을 장만하기 위해 거래되는 싸이월드의 총도토리 수는 한국 전역의 숲에 있는 도토리 수보다도 많단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싸이질'이라는 신드롬까지 생겨났으며 일촌 맺기의 촌수는 10대의 소녀에서 젠더와 연령의 벽을 넘어 전국으로 퍼졌다. 한국 인구의 3분의 1이 싸이월드의 인간띠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문화적 효과다.

잠잘 때도 서로 손을 잡고 잤다는 끈끈한 형제애와 그 구식 자전거 기술이 인간 최초의 비행기를 날게 한 것처럼(6회) 우리의 뚝배기 같은 촌스러운 '사이' 문화가 최첨단의 인터넷 '싸이' 문화를 날게 한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19 19:19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