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주소 적는 법 하나에도 동서가 다르다. 우리는 나라에서부터 시작해 시→구→동의 순서로 자기 집 번지를 쓴 다음 마지막에 자기의 이름을 쓴다. 그러나 제임즈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인상 깊게 묘사하였듯이 유럽의 경우에는 정반대로 자신의 이름을 맨 먼저 쓰고 나라에서 끝난다.
인터넷 전자메일이 생기면서 주소를 적는 이러한 차이는 이제 무의미해졌다. 골뱅이(@)만 달면 지구의 시민이 되어 누구와도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골뱅이가 국제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르는 이름은 나라마다 다르다. 원래 @은 구텐베르크의 활자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호이지만 e-메일 표시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34년 전(1972년) 미국 BBN 회사의 레이 텀린슨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발신자의 위치표시를 나타낸 약호(略號)로 앳 사인 (at sign) 혹은 앳 심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람들은 '달팽이'라고 부르고, 독일 사람들은 '원숭이 꼬리'라고 한다. 동유럽의 폴란드나 루마니아에서는 꼬리란 말이 없어지고 그냥 '작은 원숭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북유럽의 핀란드에서는 '원숭이 꼬리'가 '고양이 꼬리'로 바뀌고, 러시아에서는 원숭이와 앙숙인 '개(소바카)'로 둔갑한다.
아시아는 아시아대로 다르다. 중국 사람들은 점잖게 쥐(鼠)에다 노(老)자를 붙여 '라오수(小老鼠)' 또는 '라오수하오(老鼠號)'라 부른다. 일본은 쓰나미의 원조인 태풍의 나라답게 '나루토(소용돌이)'라고 한다. 혹은 늘 하는 버릇처럼 일본식 영어로 '앳 마크'라고도 한다.
아무리 봐도 달팽이나 원숭이 꼬리로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오리, 개, 그리고 쥐 모양과는 닮은 데라곤 없는데도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니 문화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그러니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손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30여 개의 인터넷 사용국 중에서 @과 제일 가까운 이름은 우리나라의 골뱅인 것 같다. 골뱅이의 윗 단면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 모양이나 크기까지 어느 나라 사람이든 무릎을 칠 것 같다. 더구나 e-메일의 @으로 찌개를 끓여먹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국의 골뱅이뿐이다(물론 국제적으로 말썽이 많은 개와 달팽이를 뺀다면 말이다).
@을 '앳 사인'이라고 부르는 미국인들의 그 건조한 디지털적 논리에 비해 시각과 미각까지 겸한 아날로그 한국 골뱅이는 얼마나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냐. 로컬하면서도 글로벌한 '골뱅이'의 특성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벽을 넘어다니며 두 공간을 자유롭게 살고 있는 '번개미팅' 한국의 인터넷 유행에서도 발견된다. 말부터가 번개는 한국 토박이말이고, 미팅은 인터넷에서 80%를 점유한 영어다. 그러면서도 그 말이 줄어서 영어는 차차 자취를 감춰 번개로 통하고, 정규적으로 만날 때에는 '정모'가 되어 온라인.오프라인은 자연스럽게 온.오프로 스위치된다. 작은 인터넷 모임이 한국 전체의 거리와 광장을 뒤집어놓은 월드컵 붉은 악마의 힘도 그 골뱅이와 '번개'의 힘에서 나온 것이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일본에서 번개라고 하면 '피카추'의 전기 쥐 꼬리를 연상할 것이다. 그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두 공간이 완전히 닫혀 있어서 인터넷에 한번 갇히면 영영 헤어나오지 못한다. '히키고모리'나 '파라자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폐증 환자들이다. 연일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지언정 한국의 젊은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깥세상으로 나와 번개미팅을 한다. 그래서 일본의 관계자들은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부러워한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16 19:2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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